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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성폐기물 관리 정책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안전성과 과학적 타당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역 주민의 수용성과 절차의 정당성, 정보의 투명성 등 사회적 요소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정책이 된다.
1980년대 후반, 원자력 발전 확대와 함께 방사성폐기물의 처분 문제가 국가적 과제로 부상했다. 정부는 원전 부지 내 임시 저장을 넘어서 전국 단위의 처분시설 부지를 확보하려 했고, 1989년부터 본격적인 부지선정에 나섰다. 그러나 기술적 필요성만으로는 사회적 저항을 극복할 수 없었다.
지역사회는 이 문제를 단순한 과학기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정부의 비공개적 접근은 주민 반발을 더욱 키웠다. 안면도 사태로 대표되는 격렬한 갈등은 방사성폐기물 정책이 기술 중심에서 사회 수용성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안면도와 굴업도를 둘러싼 갈등과 계획의 반복된 좌절은 단순한 실패가 아닌 제도적 변화와 정책 전환의 중요한 계기를 남겼다. 지난호에서는 방사성폐기물 관리 정책 수립 동기와 시대 배경을 살펴보았다. 이번 여름호에서는 그 두 번째 이야기로, 이 시기의 정책 전개 과정과 사회적 반응을 통해 방사성폐기물 관리가 어떻게 전환점을 맞이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정책 전환을 촉발한 사회적 반응>
1989년, 정부와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과 사용후핵연료를 함께 관리하는 종합 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부지선정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동해안이 유력한 후보지였으나 지역 반발과 설득 실패로 중단되었다. 이후 충남 안면도를 제2원자력연구소 후보지로 삼고 연구시설과 중간저장시설을 연계해 조성하는 계획이 마련됐다. 그러나 1990년, 안면도 지역사회는 즉각적인 반발에 나섰고 등교 거부·공무원 집단사퇴·시위 등 대규모 저항이 이어졌다. 결국 정부는 계획을 전면 철회하며 방사성폐기물 부지선정 정책의 첫 번째 실패를 기록하게 된다.
안면도 반대 시위(1990.11.)
안면도 철회 이후 정부는 부지선정 방식 자체의 전환을 시도했다. 1991년, 전국을 대상으로 자발적 유치 공모를 시행하고, 기술적 타당성과 사회적 조건을 고려해 총 44개 신청지 중 7개 지역을 1차 후보지로 도출했다.
하지만 제도적 보장 없이 주민 참여만을 강조한 방식은 한계에 부딪혔고 유치 찬반이 뒤섞인 지역에서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청하·안면도 등 주요 후보지는 또다시 철회되었으며 ‘공개적 절차’라는 구호와 달리 실질적인 사회적 합의 시스템은 구축되지 않았다.
<국민 신뢰를 위한 방촉법 제정>
잇따른 실패와 사회적 불신 속에서 1993년, 문민정부는 방사성폐기물관리 사업의 새로운 원칙을 제시한다. ‘절차의 민주성, 지역개발과의 연계, 주민합의’라는 3대 원칙에 따라, 「방사성폐기물관리 사업 촉진 및 시설 주변 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방촉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처음으로 주민 지원사업, 공청회 의무화, 의견 수렴 절차를 제도화하면서 방폐물 정책이 ‘사회적 수용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뤄지기 시작한 이정표였다.
원자력제2연구소 발족(1990.10.30.)
서울대 인구발전문제연구소 2차 공개토론회(1993.08.)
방촉법 이후, 경남 양산시 장안읍과 경북 울진군 기성면에서 자발적 유치 신청이 이어졌지만 내부 찬반 갈등과 반핵단체의 격렬한 반발로 사업은 다시 실패했다. 이 시기를 통해 정부는 부지선정이 더 이상 한 기관의 노력만으로는 추진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방폐장 논의의 전환점, 굴업도 프로젝트>
인천에서의 굴업도 지정 반대 시위(1994)
굴업도 현지답사(1995.04.)
1994년, 정부는 부지선정 권한을 국무총리 직속 ‘방사성폐기물 관리 사업 추진위원회’로 이관하고 지역 지원금 500억 원을 포함한 대규모 지역개발 계획과 함께 인천 옹진군 굴업도를 최종 후보지로 발표했다. 초기에는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업이 진행됐지만 1995년 인근 해역에서 활성단층의 징후가 발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지질학적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국내외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정부는 결국 굴업도 지정·고시를 해제하고 사업을 공식 중단했다. 기술적 타당성과 사회적 수용성이라는 두 축 중 이번에는 기술적 근거에 따라 정책이 철회된 것이다. 이후 주민 보상, 재단 해산, 지역 갈등 조정 등의 후속 조치가 이어지며 굴업도 프로젝트는 한국 방사성폐기물 정책사에서 가장 크고 복합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방사성폐기물 부지선정 정책은 수차례의 시도와 철회를 거듭하면서도 분명한 변화를 이뤄냈다. 안면도에서 굴업도에 이르는 각각의 사례는 단순한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정책이 기술 중심에서 사회 중심으로 이동해 가는 전환의 과정이었다. 특히 방촉법 제정은 그동안 제도화되지 못했던 주민 참여를 법적으로 보장한 첫 시도였고, 굴업도 철회는 과학적 기준이 실제 정책 판단에 영향을 미친 최초의 사례로 남았다. 이 시기를 거치며 단일 부처 중심의 구조도 범정부 협력 체계로 점차 전환되었다.
결과적으로 방사성폐기물 정책은 ‘기술적 해법’만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공론과 투명성, 신뢰를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틀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은 이후 방사성폐기물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려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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